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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플은 어떻게 브라운을 훔쳤나: ‘더 적게, 그러나 더 좋게’의 위대한 유산

    애플은 어떻게 브라운을 훔쳤나: ‘더 적게, 그러나 더 좋게’의 위대한 유산

    우리 손에 들린 스마트폰, 책상 위 컴퓨터, 일상의 수많은 제품 디자인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한 이름과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독일의 가전제품 회사, 브라운(Braun)입니다. 브라운의 디자인 철학, 특히 디터 람스(Dieter Rams)가 주창한 “Weniger, aber besser (더 적게, 그러나 더 좋게)”라는 원칙은 단순히 아름다운 사물을 만드는 것을 넘어, 현대 산업 디자인의 문법을 새로 썼습니다. 그 가장 유명한 계승자가 바로 애플(Apple)입니다. 1958년의 브라운 T3 포켓 라디오가 2001년 애플의 첫 아이팟으로 재탄생하고, 1987년의 ET66 계산기가 2007년 아이폰 계산기 앱의 모습으로 부활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디자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오마주이자, 한 브랜드의 철학이 시대를 넘어 어떻게 영속성을 갖는지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입니다.

    이 글은 단순한 가전 회사를 넘어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자 디자인 철학의 상징이 된 브라운의 역사를 깊이 파고듭니다.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출발해 디자인 혁명을 이끌고, 거대 자본에 흡수된 후 브랜드가 분화되기까지의 여정을 따라가 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제품 소유자, 디자이너, 그리고 비즈니스 전략가로서 오늘날의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데 적용할 수 있는 시대를 초월하는 교훈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브라운의 이야기는 성공과 역설, 그리고 끝나지 않은 유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브라운 디자인, 신화의 시작

    기술에서 철학으로: 막스와 브라운 형제

    브라운의 이야기는 1921년, 엔지니어 막스 브라운(Max Braun)이 프랑크푸르트에 세운 작은 공방에서 시작됩니다. 초창기 브라운의 DNA는 기술적 정밀성과 엔지니어링 그 자체였습니다. 라디오 부품 생산으로 시작해 완전한 라디오 세트를 만들며 회사는 성장했지만, 당시의 디자인은 시대의 유행을 따르거나 미국 제품을 모방하는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1951년, 창업주 막스 브라운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그의 두 아들, 에르빈(경영)과 아르투르(기술)가 회사를 물려받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2세대 경영진은 모방에서 벗어나 브라운만의 독자적이고 현대적인 정체성을 구축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제품을 파는 것을 넘어, ‘좋은 생활양식(der gute Wohnstil)’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자 하는 원대한 비전을 품었습니다. 이 결정은 브라운의 운명을 바꾸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실용적 엔지니어링 정신과 아들들의 이상주의적 문화 포부가 결합되며, 훗날 펼쳐질 디자인 혁명의 비옥한 토양이 마련되었습니다. 이는 전후 독일 사회가 낡은 것을 버리고 합리적이고 정직한 새로움을 갈망하던 시대정신과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디자인 혁명의 동맹: 울름 조형대학

    자신들의 비전을 실현할 파트너를 찾던 브라운 형제는 바우하우스의 지적 계승자로 평가받던 울름 조형대학(Hochschule für Gestaltung Ulm)과 공식적인 파트너십을 체결합니다. 이는 브라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략적 결정이었습니다. 막스 빌, 오틀 아이허, 한스 구겔로트 등이 이끌던 울름 조ahc은 예술가 중심의 디자인에서 벗어나, 시스템에 기반한 엄격하고 과학적인 접근법을 추구했습니다.

    이 협력을 통해 브라운은 산업적 기반과 자본을, 울름은 이론적 틀과 인재를 제공하는 완벽한 공생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브라운의 디자인은 더 이상 피상적인 ‘스타일링’이 아닌, 깊이 있는 철학과 방법론을 갖춘 ‘게슈탈퉁(Gestaltung, 조형)’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연합은 브라운 디자인 혁명의 엔진 역할을 하며, 이후 등장할 모든 아이코닉한 제품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신화의 탄생, SK 4 “백설공주의 관”

    울름과의 협력이 낳은 가장 상징적인 결과물은 1956년에 발표된 SK 4 라디오-축음기입니다. 이 제품은 당시 시장을 지배하던 무겁고 장식적인 목재 가구 형태의 오디오와는 완전히 다른, 급진적인 미학을 제시했습니다. 깨끗한 흰색 금속 몸체와 밝은 목재 패널, 그리고 내부의 기계 장치를 그대로 드러내는 투명한 아크릴 덮개는 기능적 정직성과 명료함에 대한 선언이었습니다. “백설공주의 관(Schneewittchensarg)”이라는 별명은 그 미니멀하고 영적인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표현합니다.

    중요한 점은 SK 4가 한 명의 천재 디자이너가 아닌, 집단 지성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젊은 건축가였던 디터 람스가 금속 케이스라는 초기 아이디어를 제공했지만, 최종 디자인을 완성하고 투명 아크릴 덮개라는 혁신적인 요소를 더한 것은 울름의 교수 한스 구겔로트였습니다. SK 4는 브라운의 새로운 디자인 언어를 세상에 각인시켰고, 오디오 기기를 가구가 아닌 독립적인 기술 오브제로 재정의하며 후대 산업 디자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디터 람스의 시대: 좋은 디자인의 성문화

    질서의 건축가, 디터 람스

    대중적으로 브라운 디자인은 디터 람스라는 한 인물과 동의어로 여겨집니다. 1955년 회사에 합류하여 1961년부터 1995년까지 디자인 부서를 이끈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브라운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브라운 스타일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울름과의 협력으로 이미 확립된 디자인 언어를 ‘성숙시키고, 체계화하며, 수십 년간 수백 개의 제품을 통해 거장답게 실행’한 데 있습니다. 그는 이미 잘 구성된 오케스트라의 명지휘자였습니다.

    그의 철학은 “Weniger, aber besser (더 적게, 그러나 더 좋게)”라는 문구로 요약됩니다. 이는 단순히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는 미니멀리즘을 넘어, 본질에 집중함으로써 제품의 유용성과 명료함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람스는 디자이너의 역할을 단순히 아름다운 형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제품을 이해하기 쉽고 유용하게 만들어 사용자의 삶을 돕는 ‘사용자의 옹호자’로 정의했습니다.

    시대를 초월하는 10가지 원칙

    1970년대에 이르러 람스는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명문화된 10가지 원칙으로 정리했습니다. 이는 그때까지 암묵적으로 존재하던 브라운의 접근 방식을 체계화한 것으로, 오늘날까지 전 세계 디자이너들에게 교과서적인 기준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원칙 (한국어)원칙 (영어)
    1. 좋은 디자인은 혁신적이다.Good design is innovative.
    2.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유용하게 한다.Good design makes a product useful.
    3. 좋은 디자인은 아름답다.Good design is aesthetic.
    4.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이해하기 쉽게 한다.Good design makes a product understandable.
    5. 좋은 디자인은 정직하다.Good design is honest.
    6. 좋은 디자인은 과시하지 않는다.Good design is unobtrusive.
    7. 좋은 디자인은 오래 지속된다.Good design is long-lasting.
    8. 좋은 디자인은 마지막 디테일까지 철저하다.Good design is thorough down to the last detail.
    9. 좋은 디자인은 환경 친화적이다.Good design is environmentally friendly.
    10. 좋은 디자인은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디자인한다.Good design is as little design as possible.

    이 원칙들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제품을 이해하기 쉽게 한다”는 원칙은 ET66 계산기의 직관적인 버튼 배치에서, “오래 지속된다”는 원칙은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현대적인 브라운 오디오 시스템에서, 그리고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디자인한다”는 궁극적인 철학은 모든 브라운 제품의 순수한 형태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철학이 담긴 제품들: 라디오, 면도기, 그리고 시스템

    람스의 지휘 아래 브라운 디자인 부서는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켰습니다. 애플 아이팟의 직접적인 영감이 된 T3 포켓 라디오는 극도의 단순함과 직관적인 조작 방식으로 휴대용 기기 디자인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전기면도기 라인은 기능적인 형태와 손에 쥐었을 때의 편안함을 결합한 인체공학적 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SK 4와 같은 일체형 기기에서 벗어나 각 유닛을 분리하고 조합할 수 있는 모듈형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TS45, TG60 등)은 브라운의 시스템적 사고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는 사용자가 필요에 따라 기능을 확장할 수 있게 하는 유연성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미니멀한 금속 스탠드 위에 얇은 패널을 얹은 L2 스피커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공간에 녹아드는 “조용한 조력자”로서의 디자인 철학을 완벽하게 구현한 예시입니다.


    철학의 역설: 거대 자본과 브랜드의 진화

    질레트와 P&G: 거인의 그림자 속으로

    브라운의 디자인 철학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역설적이게도 회사의 운명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1967년, 브라운 가문은 미국의 질레트(Gillette)에 회사 지분을 매각했습니다. 전기면도기 시장의 강자였던 브라운은 면도기 중심의 포트폴리오를 가진 질레트에게 매력적인 인수 대상이었습니다. 이 시점부터 브라운의 사업 중심은 오디오와 같은 문화적 상징성이 강한 제품에서 면도기, 제모기 등 수익성이 높은 퍼스널 케어 분야로 점차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브라운의 상징과도 같았던 하이파이 오디오 사업부는 1990년에 공식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2005년, 세계 최대의 소비재 기업 프록터 앤드 갬블(P&G)이 질레트를 인수하면서 브라운은 거대 글로벌 기업의 수많은 브랜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P&G의 전략은 막대한 마케팅과 유통망을 활용해 카테고리별 ‘메가 브랜드’를 육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디자인 철학을 중심으로 통합된 제품군을 만들던 초기 브라운의 모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 방식이었습니다.

    분화된 이름, 브라운

    브랜드의 분화는 2012년에 정점을 맞습니다. P&G가 브라운의 주방 가전 사업 부문에 대한 라이선스를 이탈리아의 드롱기(De’Longhi) 그룹에 부여한 것입니다. 이로써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브라운’은 더 이상 단일한 회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P&G는 면도기와 같은 퍼스널 케어 및 체온계 등 헬스케어 제품을, 드롱기는 블렌더나 커피메이커 같은 주방 가전제품을 각각 생산하고 판매합니다.

    초기 브라운에서 라디오와 블렌더는 “Weniger, aber besser”라는 동일한 철학의 산물이었지만, 이제 ‘브라운’이라는 이름은 ‘독일의 엔지니어링과 디자인’이라는 상징적 가치를 지닌 지적 재산이 되어, 각기 다른 전략을 가진 회사들의 제품에 부착되고 있습니다. 디터 람스 시대의 통일되고 체계적인 ‘브라운 스타일’은, 이제는 통합적으로 창조되기보다 개별적으로 관리되고 마케팅되는 ‘브라운 브랜드 정체성’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끝나지 않은 유산과 오늘날의 교훈

    애플의 오마주: 모방인가, 계승인가?

    브라운의 가장 가시적이고 강력한 유산은 애플에 미친 영향입니다. 애플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는 디터 람스를 자신의 가장 큰 영감의 원천으로 공공연하게 밝혔습니다. T3 라디오와 아이팟, ET66 계산기와 아이폰 계산기 앱, LE1 스피커와 아이맥의 디자인적 유사성은 이를 명백히 증명합니다. 이는 단순한 모방을 넘어선, 핵심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경을 바탕으로 한 창조적 계승입니다.

    물론 애플의 천재성은 단순한 복제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브라운의 미학, 즉 정직한 재료, 깨끗한 선, 사용자 중심의 명료함을 채택하면서도, 이를 빠른 기술 혁신, 강력한 소프트웨어 생태계, 그리고 지속적인 업그레이드를 유도하는 마케팅 전략과 성공적으로 결합했습니다. 브라운의 철학이 ‘오래 지속되는’ 제품을 지향했다면, 애플은 브라운의 미학을 ‘오래 소유하고 싶지만, 계속 새로운 것으로 바꾸고 싶은’ 제품에 녹여냈습니다. 이 지점에서 두 브랜드의 운명은 갈렸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브라운에게서 배워야 할 것

    브라운의 역사는 오늘날 제품을 만드는 우리에게 여러 중요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첫째, 명확하고 강력한 제품 철학의 중요성입니다. “더 적게, 그러나 더 좋게”라는 철학은 수십 년간 수많은 제품에 일관된 영혼을 불어넣었고, 이것이 바로 시대를 초월하는 브랜드 가치를 만들었습니다. 둘째, 디자인 시스템의 힘입니다. 브라운은 개별 제품이 아닌, 상호 연결된 하나의 시스템을 디자인했습니다. 이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사용자 경험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동시에 브라운의 역사는 주의점 또한 일깨워줍니다. 순수한 디자인 철학만으로는 거대한 시장의 논리와 소비주의의 흐름 속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수 있다는 현실입니다. 브라운이 추구했던 ‘과시하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가치는 빠른 교체 주기를 기반으로 하는 현대 시장의 원리와 본질적으로 충돌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제품의 이상과 비즈니스의 현실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결론: 유산은 제품이 아닌 아이디어에 있다

    1960년대의 통일되고 혁신적이었던 기업 브라운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오늘날 ‘브라운’은 훌륭한 제품을 만드는 존경받는 브랜드 이름으로 존재하지만, 그 영혼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그러나 브라운의 진정한 유산은 현재 판매되는 제품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에 남긴 강력한 아이디어의 집합 그 자체입니다.

    “좋은 디자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디터 람스의 10가지 원칙은 기업 브라운의 소유를 넘어, 전 세계 디자이너와 창작자들을 위한 보편적인 기준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브라운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애플을 비롯한 수많은 기업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그리고 더 나은 제품을 만들고자 고민하는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서 계속 쓰이고 있습니다.